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해서 우리나라의 탄탄한 IT 경쟁력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국내 IT 환경 및 소프트웨어 기반이 처음부터 유망했던 것은 아니다. 컴퓨터 한 대 없이 마치 황무지와도 같았던 1960년대 대한민국에서 정보통신산업은 어떻게 자리 잡아 왔을까? 소프트웨어 산업 발전 유공자로는 최초로 금탄산업훈장을 수훈한 KCC정보통신 이주용 회장이 개척해온 지난 반세기를 살펴보면 그 답이 나올 듯하다.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은 KCC정보통신의 이주용 회장에게 대한민국 정보통신 발전 과정과 KCC정보통신이 나아갈 길에 대해 들었다. Interview 손홍락 발행인  Editor 박인혁  Photographer 권상훈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분야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저도 제가 가장 잘 아는 분야인 컴퓨터를 통해 국가에 기여하려고 한평생 노력해왔습니다.”
지난해 11월 28일.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에 기여한 이들을 격려하기 위한 제17회 SW산업인의 날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 KCC정보통신 이주용 회장은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며 그동안 대한민국 정보통신의 발전에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KCC정보통신이 걸어온 지난 50년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이주용 회장의 담담한 한마디 수훈 소감을 들으며 이번 훈장의 의미에 대해 더욱 뭉클한 감동을 느낄 법하다. 이주용 회장은 아무런 컴퓨터 기반도 없던 대한민국이 정보통신 강국으로 불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앞장 서서 묵묵히 개척해왔고, 나아가 건축과 조선 등 산업 현장에 컴퓨터를 도입하는 등 국가경쟁력 제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구자의 마음으로 최초의 길을 걷다
소프트웨어 산업발전유공자로는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이주용 회장의 발자취에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미국 미시간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한 그는 1960년 7월에 한국인 최초로 컴퓨터 회사 IBM에 입사한다. 그 당시 IBM의 기본 월급은 전공을 살려 취직 가능한 은행권과 비교해서 약 100달러가량이 적었지만, 이주용 회장은 컴퓨터의 미래 가치를 높이 평가해 IBM에서 근무할 것을 결심했다. ‘IBM에 입사한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수식어는 이 회장의 자랑스러운 경력인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IBM에서의 근무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을 즐기는 이주용 회장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1962년 10월 중순, 이주용 회장은 7년 만에 고국 땅을 밟게 된다. 희망했던 덴마크 파견이 뜻하지 않게 좌절된 이후 회사에서 6개월간의 휴가와 여비를 배려해준 것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전쟁의 아픔과 가난을 딛고 경제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이주용 회장의 눈에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상당히 많아 보였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우리나라의 모습이 벌거숭이 민둥산이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당시 1인당 국민 소득이 78불이었는데 제 연봉은 이보다 120배 정도 많은 수준이었죠. 제 전문 분야인 컴퓨터를 고국에 들여와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회장은 컴퓨터 산업의 불모지인 대한민국에 IBM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IBM 왓슨 회장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의 당시 경제 상황을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왜 IBM이 지금 한국에 진출해야 하는지 설득하는 내용이었다. 말단직원이 회장에게 쓴 한 장의 편지는 뜻밖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왓슨 회장은 이주용 회장과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가족들이 한국과 인연이 있었기에 이 회장의 의견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정치 상황과 법리적인 문제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주용 회장은 차근차근 해결하며 마침내 IBM 한국지사의 대표 자격을 얻게 된다.
“당시 최고급 호텔이었던 반도호텔 840호가 제 집무실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조건에서 호화롭게 시작했지만 IBM이라는 이름을 듣고 여행사 정도로 인식하는 현실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어요. 결국 1년여 만에 미국인에게 대표 자리를 넘겨주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국내 제1호 컴퓨터 FACOM222
미국으로 돌아간 이주용 회장은 IBM 서비스회사인 SBC에서 근무를 재개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지만 승진이 두 번이나 좌절되는 등 동양인으로서 유리 천장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미국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주용 회장은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된다. 한국생산성본부에서 컴퓨터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67년 1월 1일, 이주용 회장은 한국생산성본부 소속의 전자계산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곳에서 이주용 회장은 국내 최초의 컴퓨터인 후찌쯔 사의 FACOM222를 들여오며 다시 한 번 선구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67년 3월에 FACOM222가 인천항에 들어왔습니다. 총 무게 35톤에 대형 트럭 5대가 동원된 엄청난 규모였죠.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도는 시가행진을 통해 제1호 컴퓨터가 들어온 것을 알렸습니다. 설치 또한 만만치 않았어요. 부피와 무게 때문에 25톤 기중기를 이용해 생산성본부의 사무실 유리창을 모두 깨고 들여와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도입만으로도 화려하게 주목받았던 사실과는 별개로 컴퓨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여전히 부족했고, 이 회장을 힘들게 했다. 한국생산성본부에서조차 컴퓨터를 커다란 계산기 정도로 인식하고 프로그래머 채용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이주용 회장은 생산성본부로부터 독립을 결심했다. 한국 최초의 IT 기업인 KCC(한국전자계산, 이하 KCC정보통신)가 설립되는 순간이었다.
1971년 한국전자계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생산성본부로부터 독립한 KCC정보통신은 국내 최초의 SI 업체다. SI는 시스템 통합(System Integration)의 약자로 기업이 특정한 업무를 위해 필요로 하는 정보시스템을 개발, 구축, 운영하기까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말한다.

주민등록번호가 13자리가 된 까닭
가끔 생활 속에서 전산화된 데이터와 체계적인 시스템에 대해 새삼스럽게 놀라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모두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그 편리함을 누리지만,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의 전산화 과정에서 이룩한 것이다. 이주용 회장과 KCC정보통신은 주민등록전산화 사업을 시작으로 철도승차권 예약판매 시스템 구축, 김포세관 전산화, 국민투표 전산화 등 다양한 사업의 중심에 있었다.
“1968년 김신조 침투 사건 이후 안보에 대한 중요성을 느낀 정부가 주민등록 전산화 작업을 기획했습니다. 1975년에 처음 이 일을 맡게 되었을 때 대상이 되는 18세 이상 인구가 2000만 명이었죠. 처음에는 못한다고 손사래를 쳤어요.” 
주민등록전산화 작업은 당시 KCC정보통신의 회사 규모에 비해 너무도 방대한 일이었다. 단 하나의 실수로도 엄청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 주변의 설득과 국가숙원사업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었다면 아마 포기했을 것이라도 이주용 회장은 회상한다.
“숫자 하나를 틀리면 남자가 여자가 되고 어린이가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죠. 실수로 인한 오류를 확인할 수 있어야 했고 북한에서 침투할 때 가짜 주민등록번호를 만들 것에도 대비해야 했어요. 이에 체크 디지트를 개발해 주민등록번호에 적용했죠.”
체크 디지트(Check Degit)는 주민등록번호의 모든 번호를 특정한 연산에 대입하면 동일한 숫자가 나타나도록 만든 일종의 오류 검사 시스템이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에게 부여되는 주민등록번호는 초기에 12자리로 만들어졌지만, 체크 디지트를 도입하면서 13자리로 다시 태어났다. 이주용 회장은 자칫 국가 안보와도 직결될 수 있는 이 연산에 대해 아무도 몰라야 한다는 이유로 호주에서 체크 디지트 연산을 개발해 들여왔다. 지금은 많은 나라에서 주민등록번호에 체크 디지트를 도입하지만, 당시로써는 최초의 시도였다고 이 회장은 회상한다. 미국의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에도 도입되지 않은 기술이었고, 이후 일본이 도입하기보다 무려 7년여가 빠른 시기였다.

대한민국 산업발전과 동행하다
주민등록번호 전산화 이후에도 컴퓨터를 이용한 발전의 현장에는 언제나 KCC정보통신이 함께 했다. 1980년에 김포공항 실시간 온라인 전산화를 일본보다 5년 앞서 성공시켰고, 1981년에는 철도청의 승차권 판매를 온라인화하여 예약관리 체제로 변경하는 제한 입찰에 뛰어들었다. IBM, 유니백, FACOM, 히타치 등 굵직한 업체들과의 입찰 경쟁 끝에 5분의 1 가격으로 입찰에 성공했고, 새마을호 열차에 처음 적용한 후 모든 열차에 확대 적용하며 예산을 대폭 절감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산업 발전에 대한 KCC정보통신의 공로는 비단 각종 정부 시스템의 전산화에만 그치지 않았다. 건설업이나 조선업 등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수출고를 올릴 때 기술적인 지원을 도맡았던 것이다. KCC정보통신이 진행해온 각종 전산화 작업들에 비해서 결코 적지 않은 성과임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이다.
“해외 건설현장에서 국내 기업들이 수출고를 올릴 때 저희 기술력이 동원됐죠. 건설업에 컴퓨터가 동원되던 과도기적인 시기였지만 특히 사우디나 쿠웨이트 같은 중남미 국가에서는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으면 수주도 할 수 없는 시기였으니까요. 현대건설이나 동아건설 등 굵직한 건설사들도 KCC를 통해야만 했습니다.”
조선업의 경우에도 KCC는 기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전적으로 일본의 조선 기술에 의존하던 시기였다. 이주용 회장은 노르웨이의 기술을 받아들이고 전산망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공정을 진행하도록 만들어 기술 독립을 이루어냈다.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도 KCC의 컴퓨터가 동원되었다.
해외 용역 수출 또한 이주용 회장이 국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부분 중 하나였다. 1968년 당시 경제수석이었던 김학렬 씨와 우연한 자리에서 만나 키펀치(Key Punch)를 활용한 EDPS 용역 수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청와대 수출확대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언급이 되며 추진된 일이었다.
이주용 회장은 천공기를 통해 컴퓨터용 카드에 구멍을 뚫어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키 펀칭 작업을 통해 많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교원공제회의 마스터파일 작성, 법무성의 출입국관리 카드 정리, 특허청의 특허 자료 전산화 작업 등을 수행했다. 미국에서도 재판기록을 전산화하는 작업을 포함해 도서관 데이터베이스, 전화번호부 등 용역 수출을 이행했다. 키펀칭 사업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외화를 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 IT 경쟁력을 크게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의 중요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며 의미 있는 작업에 공헌했다는 자부심도 대단하다.
“정부에서 우리의 공을 인정해 2년 동안 키펀칭 사업 독점권을 주려고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자장면을 잘 팔리게 하려면 중국집이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 혼자 자장면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비유를 했죠. 훗날 업체가 난립해 용역비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 독점권을 거절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맏아들 이상현 부회장과 차남 시스원 이상훈 사장
현재 이주용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나고 장남인 이상현 부회장이 경영을 승계한 상태다. 처음에는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는 신념 아래 가족경영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이 회장이지만, 후임으로 봐두었던 몇몇 임원이 건강 등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이어 퇴직하는 바람에 맏아들을 후계자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걱정이 컸습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외부로부터 인정도 받고 큰 성과를 내기 시작하더군요. 직원들과 소통도 잘하고 무엇보다 큰 그림을 그릴 줄 알게 됐지요. 지금은 모든 걸 믿고 맡기는 편입니다.”
이상현 부회장은 1990년 한국전자계산에 평사원으로 입사했으며, 본격적으로 경영을 계승한 이후에는 적극적인 사업다각화로 KCC를 성장시켜왔다. 가장 성과를 보인 분야는 자동차 수입 시장이다. 2004년에 혼다 브랜드로 자동차 판매 및 차량서비스 사업을 시작한 이래, 현재는 벤츠와 재규어 랜드로버, 포르쉐, 닛산 등 7개 브랜드를 KCC오토, KCC오토모빌, KCC모터스, 아우토슈타트, 프리미어오토모빌 등의 관계사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차남인 시스원 이상훈 사장 또한 IT 부문 사업을 성장시키며 내실 있게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시스원은 자동출입국관리시스템 ‘센트리’를 개발해 인천공항과 몽골 징기스칸 국제공항 등에 공급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최근에는 ASOCIO(세계정보서비스산업기구) IT행사 최우수 ICT기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회와 함께 발전하는 장수기업 만들고파
KCC정보통신은 IT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왔다. 그 시작은 1968년 정부 EDPS(전자정보처리시스템) 요원들을 훈련시키면서부터였으며, 1993년에는 KCC정보교육센터를 설립하는 등 국내에서 수많은 IT 인재를 배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도 대학과 연계된 산학협력과 인턴십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IT전문 인력양성에 끊임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재단법인 ‘미래와 소프트웨어’를 설립하여 미래인재양성 교육을 적극 지원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사회공헌 또한 꾸준히 지속해왔다. 이주용 회장은 부친이 작고한 이듬해인 1979년에 부친 성함을 딴 ‘종하장학재단’을 만들어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근 30년에 가까운 지금까지 2,000여 명이 넘는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미국 미시간 대학교의 부설 한국학연구소, 해외유학생과 국내 각 대학에 장학금과 연구비를 지급하고 있으며, 선친 소유 대지에 종하 실내체육관을 건립, 울산시에 무상으로 기증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대학교병원 발전후원회에 10억 원을 기부하고, 서울대 ‘이주용 정보문화학 기금교수’를 위한 학교발전기금에도 10억 원을 기부 약정하는 등 거침없는 사회공헌 행보를 계속하며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있다.
KCC정보통신은 올해 10월 13일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50주년 사사인 <KCC정보통신 50년사>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임직원의 기억과 사료를 모으고 반세기 동안 회사가 걸어온 길을 정리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동안 회사와 함께 노력해온 임직원을 격려하고 앞으로 더욱 오랜 기간 회사가 나아갈 길을 예측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워크숍을 통해 의견을 모아 비전도 다시 선포했다. 새롭게 제정한 KCC정보통신의 비전은 ‘기술로 미래를 선도하는 글로벌 ICT전문기업’으로, 모두가 행복한 회사, 모두가 함께하고 싶은 회사, 모두가 자랑스러운 회사가 될 것을 지향한다. 이는 기술로 미래를 선도하는 KCC 선구자의 정신을 잃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는다.
격동의 세월을 거쳐 온 기업인의 반세기 여정이 항상 순탄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지나온 50년을 회상하는 이주용 회장의 얼굴에는 아늑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이상현 부회장과 이상훈 사장 또한 부친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없이 다정해 보였다. 50년을 지나 100년, 200년을 장수할 수 있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삼부자의 모습에서 KCC정보통신의 새로운 미래가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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