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명박 정부 시절 민영화 되었던 한국자산신탁이 2010년, 부동산 개발업체로 입지를 굳혀가던 엠디엠의 인수자로 확정되자 재계의 놀라움은 컸다. 부동산 시장의 패러다임이 일거에 바뀌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라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이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문주현 회장은 그만의 독창적인 ‘Insight(통찰력) 경영’으로 회사의 체질을 환골탈태시켰다. 부동산시장에서 마이너에 불과하던 기업을 4년이란 짧은 기간에 업계 선두자리를 위협하는 ‘Big3’로 끌어올린 것이다. 거침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새로운 ‘샐러리맨의 신화’를 써내려온 그만의 성공신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Interview 손홍락 발행인   Editor 이종진   Photographer 권용구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표현은 통상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고집불통’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데 쓰인다. 안타까움 반 비웃음 반으로 혀를 쯧쯧 차는 이들의 이마에는 걱정어린 주름마저 잡힌다. 하지만 역사는 ‘무모한 짓’을 성공시킨 극소수의 천재들이 이끌어왔다. 

돌팔매로 골리앗에게 도전한 다윗은 이 방면의 선구자다. 그리스 변방의 마케도니아를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시킨 알렉산더 대왕도 당대의 마이너리티를 이끌고 정복의 역사를 시작했으며, 인류 최초로 동서양에 걸친 ‘세계 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 역시 열악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속했던 키야트 보르지긴 부족은 초원의 강자 메르키트의 노예였고 부족민의 수를 모두 합해봐야 채 1만 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날카로운 송곳이 구멍을 뚫는다.

현재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구글과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마이너리티의 성공신화에 속한다. 그들의 보스(Boss) 래리 페이지,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의 ‘무모한 도전’이 성공했기 때문에 지금은 공룡 대접을 받고 있지만, 이 회사의 창립 멤버들은 출발 당시 세간의 비웃음을 결코 잊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계란으로 힘차게 바위를 내리쳐 기어코 ‘바위 깨기’에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쥐고 있는 ‘계란의 힘’을 굳게 믿는다. 문주현 회장도 자신의 계란이 마침내 바위를 깰 수 있다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을 품지 않은 인물이다.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 검정고시의 힘을 빌린 늦깎이 대학생, 일곱번의 특진으로 임원에 오른 샐러리맨의 신화, IMF 폭풍에 휘말린 실업자 신세, 원룸에서 시작된 사업의 단초, 업계의 패러다임을 바꾼 디벨로퍼, 금융업계의 신흥 강자….’

문주현 MDM·한국자산신탁 회장의 인생 단면들을 시기 순으로 늘어놓으면 그야말로 굴곡이 넘쳐 보인다. 하지만 문 회장 인생 그래프의 기울기 모양은 위 아래로 널을 뛰는 롤러코스터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치솟는 안정적인 화살표다. 그만큼 ‘럭키가이’였지만, 반면에 스스로 운을 만들어간 긍정과 열정의 화신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크고 강한 상대를 마주 대하면 오히려 자신감이 생깁니다. 내가 상대보다 작다고 지레 겁먹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요. 그렇게 피하다 보면 만만한 상대가 하나도 없어요. 결국 작고 날카로운 송곳이 구멍을 뚫는 것 아닌가요?”

문 회장의 멘트 한 마디 마다 배포와 담력이 뚝뚝 묻어난다. 남이 지어놓은 집을 팔아주다 스스로 도시를 개발하는 디벨로퍼의 경지에 오른 대가(大家)의 자신감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괴테의 말을 좋아합니다. 남보다 먼저 시작하면 유리하겠지만, 늦었어도 얼마든지 역전할 수 있는 기회는 있습니다. 역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열정과 노력이고, 실패하지 않는 방법은 통찰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문 회장은 전남 장흥 출신의 전형적인 시골 소년이었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상경해 갖은 고생을 겪은 일화는 흔한 성공 스토리의 양념이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오늘날 100억 원 규모의 문주장학재단을 만든 모티브로 작용했다.     

문주현 회장이 이끄는 ㈜엠디엠과 한국자산신탁㈜은 지난 1월 8일 문주장학재단에 각각 20억 원과 10억 원을 장학기금으로 전달해, 총 출연금 100억 원 조성에 성공했다. 지난 2001년 5억 원을 출연해 만든 장학재단이 모태로, 당시는 문 회장의 회사 자본금이 1억 원에 불과할 정도로 아직 사업이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 회장은 ‘자신이 사회에 기여하면서 사업을 이루고 또 이룬 것을 다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장학재단을 설립했고 마침내 장학기금 100억 원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기업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사업을 열심히 하면서 힘이 닿는 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열어주고 싶습니다.”

문주장학재단은 지난해 177명에게 장학금 3억5000만 원을 수여하는 등 재단 설립 이후 총 1176명에게 13억5000만 원을 전달했다. 올해도 다양한 장학사업을 전개,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도울 예정이다. 아울러 사회공헌 활동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샐러리맨의 신화에서 디벨로퍼로

장학사업에 열을 쏟는 문주현 회장의 모습에서, 자신감 넘치고 실패를 모르는 강인한 사업가의 외형과는 또 다른 감수성과 휴머니즘을 발견하게 된다. 

젊은 나이에 교회에서 만나 신앙의 힘으로 우정을 쌓아온 김명도 전(前) 현대스위스2저축은행장은 이러한 문 회장의 인생철학을 가슴깊이 이해하는 벗이다.   

“문주현 회장은 강·온 양면을 모두 갖춘 분입니다. 겉으로는 특유의 추진력과 열정으로 달려가는 강인한 모습이지만 구성원들을 포용하고 소외된 이들을 보듬어주는 감성적 휴머니즘의 소유자이기도 하지요.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눈물을 흘릴 줄 안다고 표현하면 적당할 듯 싶습니다. 스타일에서도 냉철한 이성과 섬세한 감성의 균형을 맞추는 중용의 모습을 보입니다. 경영자로서 타고난 자질을 지니고 있는 친구지요.”

냉철한 이성과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문주현 회장의 젊은 시절은 승승장구하는 샐러리맨의 표상이었다. 

문 회장은 검정고시를 거쳐 늦깎이 대학생으로 회계학을 전공한 뒤 당시에 떠오르는 기업인  나산그룹에 입사했다. 이후 공채 1기 출신 문주현 사원의 행보는 그야말로 눈부셨다. 휴일에도 출근해 일하며 발군의 실적을 올린 그에게 회사는 일곱번의 특진으로 임원 자리를 마련해 화답했고 나산그룹 성장의 공신으로 올라섰다.  

강남 테헤란로 일대 개발 붐이 불면서 나산실업이 건설업에 진출한 것은 영업통 문 회장에게 ‘돗자리’를 깔아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부동산개발 분야에서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문 회장은 업계 최초의 신화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나산실업에서 주상복합 1호를 지었고, 주거용 오피스텔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가 임원으로 승진하며 미친 듯이 일하는 동안 나산그룹도 30대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현대에 이명박이 있었다면, 나산에는 문주현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샐러리맨 성공 신화의 주역으로 주목받았지만, 냉혹한 인생은 문 회장을 담금질하기 위하여 ‘위기’를 선물했다. 

IMF 외환위기로 나산그룹은 부도가 났고 ‘실직자 문주현’으로 내몰렸지만 당시의 위기는 오히려 ‘문주현 CEO’ 출발의 서막이었다. 1998년 단돈 5000만 원을 손에 쥐고 33㎡짜리 원룸에서 창업한 회사가 바로 오늘날의 MDM이다.

“당시만 해도 영어로 회사 이름을 짓는 곳이 별로 없었습니다. MDM은 제 성인 Moon과  Development & Marketing의 약자인데, 한번 제 이름을 걸고 도전해보자는 마음이 이런 이름을 짓게 된 계기였죠.”

이름을 걸고 시작한 사업은 그에게 우리나라에서 디벨로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안겨주었다. 그가 이끄는 MDM은 판교, 송파 등 각종 개발사업에서 발군의 실적을 기록했고, 결국 지금의 한국자산신탁을 비롯해 KAIT캐피탈 등 종합 부동산·금융기업군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성공의 비결은 ‘이른바 MDM은 다르다’는 세간의 신뢰였다. MDM은 시공사의 보증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PF를 이끌어내는 시행사라는 점에서 소비자들의 신뢰를 받았고 이는 그가 자주 인용하는 ‘대박’으로 이어졌다. 

“디벨로퍼는 부지 매입, 기획 설계, 금융, 건설, 마케팅, 홍보, 유지 보수 등 다양한 분야의 역량이 어우러지는 종합 비즈니스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주택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짓기만 하면 팔렸지만 지금은 입지가 좋은 곳에, 좋은 상품을 만들어야만 팔리는 시대가 됐지요. 결국 디벨로퍼의 안목에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남들이 말리는 주거용 오피스텔 건축도 새로운 발상에서 비롯됐습니다. 고정관념에 얽매어 있으면 결코 앞서가지 못합니다. 생각의 틀을 과감히 깨야 가능합니다.”

‘생각의 틀을 깬’ 문 회장은 입지여건이 우수하지만 저평가된 부지를 선정하고, 클럽하우스, 게스트룸, 휘트니스 등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진 편리한 주거공간에 살고 싶어하는 소비자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성공해 잇따라 ‘대박신화’를 터뜨렸다. 

서울 대치동 선릉역 인근 KAIT타워(옛 토마토빌딩) 20층의 문주현 MDM · 한국자산신탁 회장 사무실에는 아파트 관련 도면과 모형도로 사무실이 비좁다. 그동안 시행 및 마케팅을 벌여온 사업지에 대한 소중한 자료다. 직접 각종 프로젝트의 도면을 들고 그동안 해왔고 진행하고 있는 비즈니스에 대해서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 오픈 마인드가 느껴진다. 

“제가 그동안 해 온 사업은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창조적인 작업과 비슷합니다. 안정적인 자본과 인력으로 무난하게 해오는 분야와는 특성이 다르지요. 그래서 저부터 남다른 발상으로 도전하는 열정을 잃지 않으면서 우수한 인재를 키우기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 합니다.” 

트렌드를 읽고 반 보 앞서가라

특유의 친화력과 열정으로 창업 15년 만에 국내 최대 디벨로퍼(개발업체)로 우뚝 선 문 회장은 지금의 성공에 자만하지 않는 비결로 초심을 강조한다. 

“늘 초심을 잃지 않고 조심스럽게 한발씩 내딛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침이 많은 부동산 개발 시장에서 모범이 되는 회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신감도 중요하지만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그래서 문 회장은 늘 즐겁고 유쾌한 기분으로 사람을 만나려고 애쓴다. 소주 한 잔이 주량일 정도로 술을 잘하지 못하지만 누구를 만나더라도 금세 친해지는 비결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의 마인드에서 비롯됐다.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할 당시 금융 대기업에 인수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우리 회사로 결정이 나자 모두 놀랐지요. 그때 노조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우리 회사와 저에게 거부감이 많았어요. 노조에서 반대를 하고 비협조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하지만 제가 마음을 열고 다가가자 조금씩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점령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문주현 회장은 자원한 직원 1명과 단 둘이 한국자산신탁에 들어가 인수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얼마 안가서 노조가 자진 해산하고 회사 살리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후에는 함께 회사를 발전시키는데 중지를 모으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동안 잘 안된 부분에 대해 분석하고 머리를 모았지요. 사람이 부족하다 그러더군요. 그럼 사람을 뽑으라고 했는데 못뽑아요. 그럼 똑똑한 인재를 스카웃해 오라고 해서 업계의 인재를 뽑아왔습니다. 무조건 제 의지만 관철시키지 않고 공을 넘겨주자 오히려 주도권이 저에게 넘어오더군요.”

이렇게 시작된 MDM과 한국자산신탁의 시너지 효과는 대단했다. 금융과 부동산개발의 양 축이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MDM의 신뢰도는 높아졌고 한국자산신탁 역시 시장 점유율이 올라가 이제 업계 2위의 반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인수작업은 1년여 전부터 착실히 준비했습니다. 금융업과 공조 체제를 유지해야 부동산 개발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벨로퍼가 소프트웨어라면 금융회사는 외관을 감싸는 하드웨어인 셈이죠. 지금은 시너지 효과가 기대 이상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문 회장은 동전의 앙면처럼 이같은 강인함과 유연함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회사를 경영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CEO다. 이미 한번 써먹은 생각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는 그의 철학은 그의 비즈니스 역정(歷程) 내내 뒷심으로 연결되어왔다. 2007년 해운대에서의 대박신화도 이러한 신사고가 밑바탕이 되었다. 

“부산에서 첫 시행(해운대 대우 월드마크센텀) 당시 직원들 모두가 걱정했습니다. 분양가격도 비쌌고 시장은 거품을 경계하던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싼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고 설득했습니다. 명품 양복은 몇 백만원 하는 것도 있지만 싼 건 2~30만 원에도 살 수 있습니다. 명품 상품을 만들자는 취지로 부대시설과 내부 인테리어를 차별화하고 뛰어난 해운대 조망권도 내세웠더니 청약자들이 줄을 섰습니다.” 

한번 성공의 맛을 본 문 회장과 직원들은 연달아 히트를 내고 업계에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작년에 준공한 ‘판교 푸르지오월드마크’(142가구), ‘신야탑 푸르지오시티’(168실), ‘송파 푸르지오시티’(1249실) 등 입주가 잘될지 걱정인 물량들도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송파 푸르지오시티의 경우 오피스텔에 사우나와 게스트하우스 등 아파트에 버금가는 부대시설을 넣은 게 주효했습니다. 올해에는 그동안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서울에서 개발잠재력이 가장 높은 세곡, 위례, 마곡지역을 중심으로 아파트, 오피스텔 2,200세대를 시장에 선보일 계획입니다.”

이처럼 성공신화를 연속적으로 쓴 비결에 대해 그는 다시 한번 안목을 강조한다. 안목은 통찰력에서 나오고 곧 시대의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이 전제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통찰력과 오너 마인드로 무장해야

“미래를 보는 안목이 중요합니다. 산업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예측을 해야 합니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회장님은 ‘마이 카(My Car) 시대’가 올 것으로 예측하고 경부고속도로 사업에 적극 참여해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10만 명이 사는 도시면 거기에 뭐가 필요할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앞으로는 1~2인 가구 시대입니다. 또 다른 흐름은 은퇴한 베이비부머 등이 투자자로 나서면서 부동산 투자수익률에 관심이 많아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구 감소에 따른 도심회귀 현상이 강해질 전망입니다. 인구가 줄면 지방이나 변두리부터 사람들이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인구가 늘어나는 곳, 돈을 버는 도시에 땅을 사야 합니다.”

시대와 트렌드를 정확히 읽고 반 보 앞서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문 회장은 지식과 아이디어처럼 공기보다 가벼운 것을 팔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디벨로퍼도 결국 가치를 파는 직업입니다. 고객의 니즈에 부응하는 가치를 넘어 고객의 새로운 니즈를 만들어가는 가치까지 고민해야 디벨로퍼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지요. 우리 회사의 모든 직원들과 저는 늘 그것을 위해 고민하고 연구합니다.”

문주현 회장의 고민은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에서 결정적인 장애물로 등장할 저출산 고령화  현상으로까지 이어진다. 

“저출산 고령화는 내수 시장을 축소시키는 요인이자 국가적인 재앙입니다. 국가와 지자체, 그리고 기업과 국민들이 다함께 힘을 모아 극복해 나가야 하지요. 이를 위해 저도 장학사업 등 안심하고 자녀들을 보육할 수 있는 환경 만들기에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문주현 회장은 흔히 기업 경영에서 강조되는 ‘오너 마인드’를 모든 분야에서 적용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는 국가의 주인, 내가 일하는 기업의 주인, 내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가정의 주인이 나라는 생각이 사회 전반적으로 파급되어야 국가 발전, 기업 발전, 가정과 개인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개인 통장에 얼마가 들어있고 얼마가 나갔는지는 그 주인이 가장 잘 알지요. 그게 주인의식이고 오너 마인드입니다.”   

 신념을 가지고 방향을 잡고 스피디하게 추진하는 것이야 말로 변화의 시기에 경영자가 갖춰야할 덕목이라고 문 회장은 내세운다. 문 회장의 신념과 꿈처럼 엠디엠과 한국자산신탁이 모든 이의 뇌리에 아시아 최고의 종합부동산 개발회사로 우뚝 설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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