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은 자기 날개를 쓰는 새를 키운다’고 한다. 이는 부지런히 자기 수족을 움직여야 하늘이 내리는 행운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글로벌 골리엇이 즐비한 골프용품 업계에서 토종 브랜드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문경안 회장의 하루는 짧기만 하다. 그의 부지런함과 열정은 ‘볼’ 점유율 30%를 웃도는 성과에서도 나타난다. 외유내강 구조인 볼빅 공을 세계적 명품 브랜드로 우뚝 세우겠다는 문 회장을 지난 5월 15일 서초동 볼빅 본사 문 회장 집무실에서 만났다.    Interview 손홍락 발행인   Editor 박우현   Photographer 권용구

미국 프로골프 챔피언스 투어 최다승자, US오픈 최고령 우승자인 헤일 어윈(Hale S. Irwin)은 “골프를 즐기는 것이 바로 이기는 조건이 된다”고 했다. 즐기는 자의 열정과 경기에 대한 집중력은 오로지 승리만을 생각하는 이들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실제 뛰어난 경기를 펼친 스포츠 스타들은 인터뷰에서 “게임을 즐겼다”고 말하곤 한다. 물론 실력이 뒷받침 되었을 때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20년 넘게 골프를 즐겼다는 볼빅 문경안 회장은 취미가 직업이 된 케이스이다. 지겨울 법도 하지만 여전히 골프 이야기에 눈을 반짝인다. 2009년 국산 골프공 브랜드 볼빅을 인수하고, 단 4년 만에 글로벌 브랜드를 위협하는 다크호스로 성장시킨 그의 저력은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단순히 사업수완이 좋았다고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무엇’이 있다. 골프를 즐기는 만큼 사업을 즐기는 타고난 승부사 기질이 바로 그것다. 문경안 회장이 처음 골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90년대 초반.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그는 한 무역회사의 재무담당 부서에 근무하며 업무와 관련된 접대를 위해 골프를 시작했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뻘 되시는 분이 저의 모자란 실력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하셨죠. 이후 ‘폐를 끼치면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에 이를 악 물고 골프를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연 아닌 운명 이었던 볼빅 인수

출근 전과 퇴근 후 그리고 점심시간까지, 업무에 지장이 없는 시간에는 무조건 연습장으로 향했다. 하루 5시간이 넘는 강행군에 손에 물집이 잡히기를 수십 번, 육체적으로는 고된 행군과도 같았지만 오히려 점점 흥미가 붙었다. 제대로 살기위해서 ‘눈을 부릅 뜬 덕분’에 문 회장은 골프를 시작한지 8개월 만에 첫 싱글을 기록했다. 프로급 골프실력을 가진 문 회장의 공인 최고기록은 70타. 신원CC의 클럽챔피언을 지냈을 만큼 빼어난 실력을 자랑한다. 그는 1998년 철강유통회사인 비엠스틸을 창업하며 본격적인 경영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회사를 운영한지 10년쯤 되었을 무렵부터 국내 건설경기가 급속도로 침체되기 시작했다. 회사의 미래 비전이 밝지 않다고 느낀 문 회장은 사업다각화를 고민하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이끌고 갈 사업 분야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 업종으로부터 제안이 들어오던 상황이었죠.” 문 회장은 때마침 함께 골프를 치던 이동주 신원CC 사장(현 포천힐스 대표)으로부터 우연히 매물로 나온 볼빅을 소개받게 되었다. 수익구조는 좋지 않았지만 제안 당시 국제특허를 36종이나 보유할 정도로 기술력이 좋은 기업이었다. “골프공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 제품의 좋고 나쁨을 평가할 수는 있었습니다. 볼빅 고유의 기술력에 마케팅 기법만 도입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죠.” 

문 회장은 제안을 받은지 3개월 만에 인수를 결정했다. 골프를 좋아하던 CEO가 골프용품을 제조하는 기업의 CEO가 되는 순간이었다.

 

프리미엄 전략으로 체질 개선

비록 적자투성이 기업이었지만 볼빅은 골프공 제조에 있어서는 상당한 내공이 있는 기업이었다. 1980년 설립된 볼빅은 1988년부터 골프공 사업을 시작, 1990년대 중반에는 국내 골프공 수출 1위를 달성하는 등 국내 골프 산업의 성장과 그 궤를 함께 해온 기업이었다. 국내에 생산시설을 두고 많은 연구와 개발을 통해 국산 골프용품의 길을 걸어온 볼빅은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타이틀리스트’, ‘나이키’ 등 외국산 브랜드의 공세에 시장 점유율이 3%까지 추락하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국산 공에 대한 시장과 소비자의 냉랭한 시각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문 회장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고 당시를 소회했다. “내수보다는 수출에 주력하는 상황에서 항상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죠. 중저가 위주의 제품을 수출하다보니 수익구조가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국내시장을 분석해보니 프리미엄 볼이 차지하는 시장은 전체의 70%, 그러나 볼빅이 주력하는 중·저가 시장은 30%에 불과했다. 문 회장은 당장 2피스 저가 제품의 생산을 중단하고 신제품으로 개발한 프리미엄급 4피스 제품을 대표상품으로 내세우기로 결정했다. 고반발성 기능성 소재를 사용한 내측 커버와 지르코니아를 함유해 내구성을 강화시킨 외측 커버로 구성된 2중 커버 구조의 신제품은 여느 글로벌 브랜드와 비교해도 결코 기술력에서 뒤지지 않았다. 문 회장은 글로벌 브랜드와 동일하게, 국내는 물론 수출제품도 가격을 인상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볼빅의 공이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에서 만드는 해외 유명브랜드의 공보다 쌀 수는 없습니다.” 자존심보다도 향후 기업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국산=저가’라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프리미엄 상품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다.

프리미엄 전략과 함께 지금의 볼빅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상품이 바로 컬러볼이다. 과거 싸구려, 여성용 공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컬러 골프공은 볼빅 제품의 등장 이후 새로운 시장을 형성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신의 한수’는 20여 년간 아마추어 골퍼로서 활약해온 문 회장의 현장경험과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10월 어느 날 선선한 날씨에 야간 골프를 즐기던 중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밤에 흰색 공이 잘 보이지 않아 애를 먹고 있더라고요. 별도의 시장 구성이 가능하겠구나 싶어 나이트 전용 볼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문 회장은 즉각 형광색을 입힌 컬러볼을 제작, 한 야간 골프대회의 후원구로 공급해 반응을 살폈다. 볼빅의 컬러볼을 사용한 참가자 모두 본인의 공을 쉽게 찾으며 만족해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새벽·야간에도 라운딩을 즐기는 국내 골프문화의 특성상 컬러볼의 효용성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눈·비·안개가 잦은 우리나라 기후조건 하에서 그 가치가 더욱 빛났다. 당장 필드의 캐디들에 주목을 받은 볼빅의 컬러볼은 입소문을 타고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기업의 운명을 바꾼 컬러볼 출시

컬러볼의 성공은 회사의 매출과 시장점유율 신장으로 이어졌다. 문 회장의 인수 전 3~40억 원에 불과하던 연 매출액은 10배 가까이 성장했다. 더욱 주목할 점은 국내 골프공 시장판도에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기존 70%를 육박하던 글로벌 브랜드 ‘T’사의 시장점유율이 볼빅의 컬러볼 출시 이후 50% 미만으로 급전직하 하게 되었다. 대신 볼빅은 기존 3%의 점유율을 30%로 끌어올리며 국내 시장점유율 2위 업체로 우뚝 서게 되었다. 컬러볼 시장에서는 70% 이상으로 단연코 선두이다. 문경안 회장의 볼빅 인수 4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국내 시장에서 항상 ‘수퍼 갑’이었던 해외 브랜드들이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하지 않던 영업을 하더라고요.” 

컬러볼의 성공은 단순히 눈에 띄는 색감 때문만은 아니다. 볼빅 이전에도 컬러볼은 존재했지만 이는 단순히 흰색 공에 색칠을 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당연히 탄력성이 떨어져 비거리가 짧을 수 밖에 없었고 골퍼들이 기피하는 공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문 회장은 컬러볼이 싸구려라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 볼빅은 자사의 기술력이 응축된 프리미엄 컬러볼로 승부를 걸었다. 4피스 프리미엄 볼을 베이스로 커버재료에 염료를 넣어 비거리 문제를 해결했다. 40여 개에 달하는 특허, 회사 내 R&D 연구소가 밤낮없이 연구한 결과가 이 작은 공 하나에 집결되었다.

품질에 대한 자신감은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이어졌다. TV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제품에 기능적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한편 각종 대회와 프로선수들을 후원하며 인지도를 늘려갔다. 실제 프로선수들의 볼빅 공 사용이 늘면서 기능성 논란은 순식간에 종식 되었다. 스포츠 산업에서 스타마케팅은 사업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스포츠 용품의 경우 유명 스포츠 스타가 어떤 브랜드를 쓰느냐에 업계 순위가 바뀌기도 한다. 이 점을 잘 알았던 문 회장도 프로 골퍼들의 사용률을 높이기 위해 고심했지만 처음부터 쉬울 수는 없었다. 생경한 국산 브랜드, 게다가 컬러볼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성적을 내서 상금을 벌어야 하는 프로들의 입장에서는 ‘생계’가 걸린 문제였기에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운중지월(雲中之月), 구름이 걷히고 달이 빛을 발하듯 볼빅의 진가가 소문이 나자 이번에는 프로들의 러브콜이 시작되었다. 불과 몇 해 전, ‘컬러볼을 써보는 것이 어떠냐’는 요청을 거절하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골퍼들이 최근에는 먼저 후원을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국산 볼 최초 LPGA 우승 쾌거 달성

현재 볼빅 소속으로 미국 LPGA투어에서 활약 중인 선수는 총 9명이다. 오렌지 걸 최운정 등 한국 선수 8명을 비롯해, 태국 유망주 포나농 팻럼, 호주 골퍼 린지 라이트, 미국 선수 빅토리아 엘리자베스 등이 소속되어 있다.

글로벌 골프단으로 거듭나고 있는 Team Volvik 소속 선수들은 2013년 LPGA투어 개막 후 Top 10 안에 수차례 진입한데 이어, 마침내 지난해 5월 LPGA ‘퓨어실크 바하마 클래식’에서 이일희가 우승을 거두며, LPGA 최초 국산 볼 우승이라는 쾌거를 일궈냈다. 국내외 투어에서 국산 볼로 우승 기록을 연달아 세우고 있는 볼빅은 국산 골프용품 업계의 역사를 새로 고쳐 쓰고 있다. 이번 시즌 LPGA투어에서도 볼빅 소속 선수들의 선전이 이어지며 어느 때보다 LPGA투어 우승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 이미 지난 5월 볼빅 팀 소속으로 8년 만에 LPGA에 도전한 이미나 선수가 ‘노스 텍사스 LPGA 슛아웃’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그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적극적인 글로벌 마케팅 전개

볼빅 팀 선수들의 잇따른 호성적에 세계 속 볼빅의 위상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문경안 회장은 글로벌 마케팅을 더욱 강화해 볼빅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나간다는 전략이다. 2011년부터 미 LPGA와 마케팅 파트너로 함께한 볼빅은 2012년 3월, LPGA 투어 커미셔너 마이클 환과 마케팅 파트너 협약을 체결하며 더욱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볼빅은 LPGA 메이저대회인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과 ‘숍라이트 LPGA 클래식’에서 선수와 동반하는 캐디들의 캐디빕에 자사의 로고를 부착해 대회기간 볼빅의 로고를 중계방송에 노출시켰다. 또한 LPGA 투어의 중계방송 중 매일 최고의 샷을 선정하는 ‘VOLVIK, Shot of the Day’를 진행, 대회 기간 미국 전역에 볼빅의 이름을 알리는데 큰 성과를 이루었다.

브랜드 노출뿐만 아니라 대회지원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볼빅은 LPGA투어의 2부 투어 격인 ‘시멘트라 투어’를 후원하며 투어참가 선수 모두에게 볼빅의 골프공을 공식 연습구로 제공하고 있다. 시즌을 마무리 하는 시점에는 볼빅 볼로 경기에 참가한 선수에게 성적별로 인센티브도 주어지게 된다. 

상금랭킹 10위까지 이듬해 정규투어 시드를 주는 ‘볼빅 레이스 포 더 카드’는 LPGA 진출을 꿈꾸는 유망주들에게 열망의 대상이다. 2012년에는 볼빅 소속의 이미향이 볼빅 레이스 포 더 카드 6위에 올라 정규 투어 진출권을 얻었다. 이미향과 더불어 볼빅 홍보대사로 활동했던 빅토리아 엘리자베스도 3위에 올라 2013년부터 지금까지 LPGA 1부 투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골프인구가 급속하게 늘고 있는 아시아 시장도 공략목표 중 하나이다. 볼빅은 지난 2011년부터 골프용품 업계 최초로 ‘아시안투어’를 개최하며 대대적인 마케팅에 돌입했다. 아시안투어는 유럽, 미국 투어를 비롯한 세계 골프 투어 연맹에서 모두 공인한 아시아 대표 투어로, 2011~2015년 까지 매년 개최된다. 볼빅은 지난해 5월 베트남에서 내로라하는 클럽 챔피언들을 대상으로 열린 아마추어 대회 ‘볼빅-스카이레이크 트로피 2013’과 아시안투어 ‘볼빅-스카이레이크 오픈’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아시아 대표 골프 용품 브랜드로 거듭나기 위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우리나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스포츠 강국이다. 유수의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며,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을 배출해냈다. 지금도 많은 선수들이 해외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며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문경안 회장은 씁쓸하기만 하다.


 

국내 유명스타들이 토종상품 사용해야

“유명 선수들이 사용하는 스포츠 용품 중 made in Korea가 얼마나 있습니까? 해외 브랜드들이 한국 선수들의 우승 상금의 수백 배를 광고효과로 벌어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국산 볼로 한국선수가 미국무대에서 우승하는 꿈을 매일 꿉니다.”

문 회장은 스포츠와 산업이 동반성장 할 수 있는 롤 모델로 양궁을 꼽았다.

“한국 양궁이 세계대회를 휩쓸자 당시 세계 1위 활 제조업체였던 미국의 호이트 사가 신제품 활을 자국 선수에게만 공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대응해 대한양궁협회는 외제 활을 보이콧 했죠. 국산 활의 제품 개발에 탄력이 붙었습니다.” 한국 선수들이 국산 활로 금메달을 따기 시작하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시드니와 아테네, 베이징올림픽을 거치는 동안 ‘삼익’, ‘윈앤윈’ 등 한국 기업이 80%를 점유하는 시장으로 재편되었다. 2016년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골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문 회장은 양궁의 사례처럼, 한국 골프 선수들이 국산 용품을 사용해 금메달을 딸 수 있기를 희망했다.

기업 경영을 넘어 한국 스포츠 산업의 발전을 고민하는 문경안 회장의 고뇌가 느껴진다. 가까운 지인인 한국협업진흥협회 윤은기 회장의 말을 빌려본다. “토종브랜드가 힘을 쓰지 못하는 국내 골프용품업계에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문 회장은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을 하시는 분입니다. 매사에 성실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깊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요. 골프꿈나무 후원과 선수 후원 등을 통해서 주변 신뢰가 깊은 분이니 볼빅 사업도 크게 번창하시리라 생각 합니다.” 문경안 회장은 과거의 볼빅이 그랬던 것처럼 뛰어난 기술력에도 마케팅의 부재로 힘들어 하는 여러 기업들과 함께 발전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나갈 것이라고 향후 포부를 밝혔다.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개척해낸 성공의 길에 많은 이들이 동참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문 회장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국내 유명 선수들이 PGA나 LPGA에서 국내 브랜드 용품으로 우승을 하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그것이 국위선양으로 이어지고 애국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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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국제경영대학원 졸업(석사), 건영통상, SK네트웍스, 건양대학교 세무학과 겸임 교수 재임, 

現 KAGA 자문위원, 現 한국 미드 아마추어 골프 연맹 자문위원, 現 J 골프 자문위원, 

現 한국골프라이터스협회 자문위원, 現 (사)한국스포츠과학기술포럼 부회장, 現 비엠통상 대표이사, 現 볼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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