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잿더미에서 맨 손으로 일으킨 기적. 창업주 고(故) 최종건 회장이 그룹의 모태가 된 선경직물을 일으켜 세운 일화는 전설처럼 유명하다. 위기 속에 기회를 찾고 끝없는 도전을 펼친 그의 기업가 정신은 ‘어려울 때 더 강해지는 기업’ SK의 DNA에 여전히 각인되어 있다.

Editor 박우현   Cooperation SK텔레시스


 

SK의 창업주 담연(湛然) 최종건 회장은 경기도 수원 태생이다. 그가 태어난 벌말(지금의 평동)은 풍부한 수량과 평야지대를 휘돌아 흐르는 하천 덕분에 부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을에서도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최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으며 방에서 지내는 것 보다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리며 대장 놀이를 하는 것을 더욱 즐기는 개구쟁이였다.

그가 선경직물과 연을 맺게 된 것은 1944년 공무부 수습기사로 입사를 하면서 부터이다.  선경직물은 일본인이 소유한 조선의 선만주단과 일본의 경도직물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약관 18세. 최종건 회장은 어린 나이와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성실함과 특유의 리더십을 인정받아 입사 4개월여 만에 조선인 여공 100여 명을 통솔하는 생산2부장으로 파격 승진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 일군 기적

일제 식민지 시대와 독립,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현대사에서 선경직물은 과거 벌말에 존재했던 한곳의 직물공장으로 역사에서 사라질 뻔 했다. 6.25 전쟁 속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공장터. 폐허가 된 선경직물을 맨손으로 일으켜 세운 최종건 회장의 일화는 전설처럼 유명하다. 

1953년 5월 불에 탄 직기 부속품들을 골라 낸 최종건 회장은 당시 땜질을 잘하기로 유명한 친구 유만성을 찾아가 직기 재조립을 부탁했다. 최종건이 시키는 대로 유만성은 부서진 부품들로 제법 쓸만한 직기 4대를 만들어 냈고 그것은 곧 20대로 늘어났다. 최 회장은 당시 선경직물 종업원들과 자신의 마차를 이용해 5㎞ 떨어진 광교천에서 돌과 자갈을 날라 공장을 설립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잿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직기들이 제대로 인조견을 척척 짜내기 시작할 때 공장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라 여겼다. 그러나 청년 최종건은 이제 막 잿더미를 파헤치고 척박한 땅에 희망의 씨앗을 심었다고 생각했다. 

최 회장이 공장을 재건하고 직기를 조립해 정상조업에 들어갈 무렵 위기가 찾아왔다. 관재청의 ‘귀속재산 매각조치’에 따라 공장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 선경직물을 인수받기 위해선 공장 대지 4천 평을 추가로 매입해야만 했는데 전쟁 직후 연이은 사업 실패와 공장 재건으로 최 회장의 수중에는 돈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당겨진 기업인의 꿈을 멈출 수는 없었다. 

최 회장은 아버지를 찾아가 자금을 빌려보려 했지만 동생 최종현 회장의 유학비라는 이유로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결국 회장은 밤샘 고민 끝에 시집간 첫째 누나 최양분을 찾아가 아버지 몰래 땅문서를 훔쳐다 달라고 애원했다. 평소 옳지 않은 일은 생각도 하지 않던 최종건이지만 사업을 위한 그의 열정은 그보다 더 강했던 것이다. 결국 그 계획을 알게 된 아버지는 최 회장의 사업 재건에 대한 신념에 마음이 움직여 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1953년 10월 1일 드디어 SK그룹사의 시작인 선경직물의 창립이 선포되었다. 불과 1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잿더미에서 번듯한 공장의 모습으로 재건되기까지, 수 많은 밤을 공장 야전침대에서 지낸 최 회장의 노고가 결실을 맺은 순간이자, 대한민국 산업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마련되는 순간이었다.

직물회사 최초 해외수출 성공

최 회장은 선경직물 창립이후 과감한 연구개발과 날카로운 사업 감각으로 국내 직물산업을 선도하는 기업인이 되었다. 1955년 당시 빨면 줄어드는 양복 안감의 단점을 개선한 ‘닭표안감’을 개발해 전국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데 이어, 1957년 ‘봉황이불’을 출시, 10년 넘게 판매 1위를 기록하였다. 또한 1958년 국내 최초의 나일론 생산, 64년 크레폰 생산, 그리고 65년에는 선경의 효자상품인 여름용 직물 ‘깔깔이(조제트, Georgette)’를 국내 최초로 개발·생산하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선경직물은 한국 무역사에서도 기념비적인 기업이다. 1962년 대한민국 최초로 홍콩에 섬유(닭표안감)를 수출한 것이다. 직물 회사로서 최초로 해외 수출에 대한 도전을 하게하고 최종건 회장의 마음속에 사업 확장에 대한 불씨를 심은 인물은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다. 이미 선경직물에 대해 자세히 보고를 받았던 박정희 의장은 1961년 예고 없이 선경직물을 방문하여 둘러 본 후 선경직물의 성장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였고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고 한다. “앞으로 수출을 해보시오!”


 

석유사업 기틀을 마련하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직기 4대로 시작한 선경직물은 1965년, 어느새 직기 보유대수 1000대를 돌파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후에는 선경화섬(1966년), 선산섬유(1970년)등을 연이어 설립하는 한편 안정적인 직물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원사생산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1966년 최종건 회장은 선경 5개년 계획을 발표하게 되는데 1966년 아세티이트 원사공장 건설, 1967년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 건설, 1968년 제2직물공장 증설, 1969년 봉제공장 건설, 1970년 선경기술센터 개설 등을 통해 제2의 도약을 하게 된다.

하지만 1971년 뜻밖의 화를 겪게 되었다. 선경그룹의 주요회사 서울사무소들이 입주해 있던 대연각 호텔이 화마에 휩싸여 모든 서류가 불에 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피해가 컸지만 선경은 신용제일주의 영업방침을 지향해 온 덕에 자진해서 거래관계를 성실히 신고해 온 거래처가 많았다. 

1972년 12월 정부는 워커힐을 민간기업에 불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최종건 회장은 대연각 화재로 인한 손해를 벌충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또한 사업다각화의 일환으로 워커힐을 인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결국 그의 계획은 현실이 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선경의 워커힐 인수조건 하나를 붙였는데 그것은 워커힐을 세계에서 제일가는 호텔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최종건 회장의 포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경의 창업 20주년이 되는 1973년 최종건 회장은 폐암이라는 뜻밖에 병을 얻게 된다. 그는 투병 중에도 석유사업에 대한 강한 집념을 보여 1973년 7월 선경석유 주식회사를 세우고 정유회사 설립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 후 선경은 사우디 측으로부터 하루 15만 배럴 물량의 원유공급까지 약속을 받았으나 제4차 중동전의 발발로 모든 것이 무산되고 말았다. 최 회장의 정유사업에 대한 포부는 불발에 그쳤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 일단 물꼬부터 터놓은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사업을 재개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남겨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최종건 회장은 1973년 11월 향년 4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투병생활 중에도 “내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사업이 석유사업이다”라고 할 정도로 석유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그의 꿈은 최종건 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을 이끈 동생 최종현 회장에 의해 실현되었다. 선경은 1980년 대한석유지주 지분 50%를 인수하고 유공(현 SK이노베이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유공은 선경의 주력 계열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현재 SK는 전 세계 16개국, 29개 광구에서 석유 탐사 및 개발과 생산을 진행하고 있고 있으며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250일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인 5억1000만 배럴의 지분원유 매장량을 확보한 대표 에너지그룹으로 성장하였다.


굳건한 SK 만든 기업가 정신

1962년 당시 중소기업이던 선경직물이 수출전선에 뛰어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일본 무역상은 제품에 ‘Made in Japan’이라고 표시할 것을 권유할 정도. 홍콩으로의 최초 수출물량은 국내 판매가격보다 더 싼 오퍼로 손해를 입어야 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수출장벽의 문을 열기 위해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고 결국 그 해 4만 6천 달러의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지난해 SK그룹은 국내 최초로 인견직물을 수출한지 51년 만에 수출규모 82조원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특히 이는 SK그룹 창립 이래 처음으로 내수실적(81조 8060억 원, 비상장 계열사 포함)을 뛰어넘는 기록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전쟁의 폐허 속, 고물 직기 4대와 수십 명의 직원으로 시작된 선경직물은 어느새 국내 재계 수위를 달리는 대표기업 SK로 성장했다. 숱한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은 굳건한 기업. 그 근간에는 열정과 도전이라는 기업가 정신으로 그룹의 내실 있는 토대를 마련한 고 최종건 회장의 노고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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