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하철4호선 혜화역과 마로니에 공원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대학로 인도 밑을 흐르는 물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이 물길은 600여 년 전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품고 흘렀고, 근대 이후 40여 년 전까지 경성제대와 서울대 앞을 흘렀다.
Writer 도유진 문화유산 이야기꾼  

대학로를 흐르는 물길을 흥덕동천(興德洞川)이라 하는데, 명칭은 물길이 시작된 곳의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흥덕동(혜화동과 명륜동 지역의 조선시대 지명)에서 시작된 물길은 혜화초교 앞을 지나 혜화동로터리 서쪽을 따라 흐르다가,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성균관을 감싸고 흘러온 반수천과 만나 큰 물길이 되어 청계천으로 흐른다.

젊은이들의 거리, 반촌과 대학로
반수천은 성균관의 동쪽(동반수)과 서쪽(서반수)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성균관 앞에서 만나 하나가 되어 남으로 흘렀다.(성종 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지러워진 반수(泮水)의 물길을 정비하였다는 기록도 확인된다.) 광례교 앞에 다다른 반수천은 흥덕동천과 하나가 되어 청계천의 오간수문을 향한다.
반수(泮水)천이라는 이름은 성균관의 다른 이름인 반궁(泮宮)에서 유래되었다. 중국 주(周)나라 시절에 천자국에는 모양이 둥글고 사방이 물에 둘러싸인 학교를 지어 벽옹(辟雍)이라 불렀다. 반면, 제후국에는 격을 낮춰 학교의 반쪽만 물이 흐르도록 하고 반궁(泮宮)이라 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성균관을 반궁이라 불렀고, 그 옆을 흐르는 물길을 반수라 했다.
반궁이라는 성균관의 명칭은 반수뿐 아니라 여러 낱말의 근원이 되었다. 반촌(泮村)․반인(泮人)은 물론이고, 반교․반민․반와(泮蛙) 등도 반궁에서 비롯되었다.
반수천과 흥덕동천의 물길은 모두 복개되어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비교적 최근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흥덕동천도 1980년대 초 지하철4호선 공사를 하면서 완전 복개되어, 몇몇 이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 흥덕동천 가운데 광례교에서 응란교, 장경교에 이르는 구간은 서울대학교가 자리한 탓에 대학천이라 했다. 하지만 당시 서울대생들 사이에서는 대학천은 ‘세느강’, 문리대 입구에 있던 다리인 응란교는 ‘미라보다리’라 불리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반수천이 성균관을 감싸고 흘렀고, 현대에 와서는 흥덕동천이 서울대 앞을 흘렀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옮긴 이후 본격적으로 대학로라 불리게 된 이 지역은 그 영역과 성격에 차이는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번잡한 거리라는 점에서 일말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젊음의 상징이자 소비 공간이 되어버린 대학로 일대는 예전에 성균관 유생들이 노닐던 번화가였다. 지금의 대명거리인 반촌길 주변에는 성균관의 제사부터 유생의 시중까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반인(노비)들이 운영하던 쇠고기 판매업소인 현방(懸房)이 늘어서 있었다. 반인들은 유생을 위한 하숙집과 식당도 차렸고, 반촌 독점 음식인 설렁탕도 만들어 팔았다.

한 공간에 자리한 다양한 역사
성균관의 서북쪽에는 대성전에 모신 중국의 5성(공자, 증자, 안자, 맹자, 자은)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인 계성사가 있었다. 계성사는 1954년 성균관대학교를 지으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계성사 서쪽에는 왕이 대성전과 계성사를 찾아 제사를 지낼 때에만 사용하던 우물인 어정수(御井水)가 있다. 어정수는 지금도 성균관대학교 학생회관 앞 담벼락 밖 도로변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성균관의 동북쪽 방향에는 산수가 맑고 아름다우며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이 피어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하나인 흥덕동이 자리하고 있다. 흥덕동 지명은 왕위를 내어놓은 태조가 새로 지어 살던 집을 희사해서 지은 절인 흥덕사(興德寺)에서 비롯되었다. 태조가 죽은 후에도 도성 내의 큰 사찰로 교종(敎宗)의 본사(本寺) 역할을 하던 흥덕사는 연산군의 폐불정책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 흥덕사가 자리했던 터에 우암(尤庵) 송시열(1607, 선조40 ~ 1689, 숙종15)이 살았다. 그 흔적은 큰 바위에 새겨진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송시열의 글씨에서도 확인된다. ‘중자와 주자처럼 정도를 지키며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처럼 타협을 거부하고 독선적인 삶을 살았던 송시열이 이곳에 살면서, 마을 이름도 송동으로 불린다.
1883년, 고종은 명성황후의 청으로 흥덕사터와 송동에 걸쳐 관우의 사당인 북묘를 짓는다. 도성 안에 자리한 북묘와 얽힌 이야기가 있다.
임오군란(1882)으로 충주까지 피난을 간 명성황후는 피신처에 있는 국망산에 올랐다가 무당을 만나게 된다. 명성황후를 마주한 이 무당은 국망산 이름을 풀이하여, 팔월 보름날 황후를 모시러 오는 사자가 도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예측이 적중하자 탄복한 황후는 환궁할 때 이 무당을 데리고 왔다. 어느 날 무당은 관우 사당을 지을 것을 청하고, 이에 응한 명성황후는 고종에 주청하여 북묘를 짓게 된다. 이후 무당은 진령군(眞靈君)에 봉해졌으나, 갑신정변(1884)과 갑오개혁(1894), 청일전쟁 등으로 북묘와 함께 부침하다가 을미년 명성황후살해사건(明成皇后殺害事件) 발생 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북묘가 지어진지 12년만의 일이었다.
1902년 북묘는 왕묘에서 황제묘로 승격되었으나, 1908년 동묘에 통폐합되었다. 1913년 일제는 북묘 건물과 토지를 매물로 내놓았고, 2년 후인 1915년 이곳에는 불교중앙학림이 자리하게 된다. 1927년에는 보성학교가 수송동에서 중앙학림의 동쪽으로 옮겨왔다가, 1989년 송파구 방이동으로 이전했다.

아픔•시련•희망의 상징으로 남은 대학로
인근에 있는 혜화초등학교는 1910년 반촌에 살던 반인들이 자신들의 아이를 위해 자금을 출연해 설립한 ‘숭정의숙’이 그 모태다. 남쪽으로 제2공화국의 내각책임제 국무총리였던 장면이 살던 집을 거쳐, 혜화동로터리에 이르면 몽양(夢陽) 여운형이 암살당한 현장을 만나볼 수 있다.
로터리 동쪽에는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에 이어 1927년 세워진 서울의 세 번째 성당인 혜화성당이 있다. 이곳은 5.16군사쿠데타 직후 장면 국무총리가 장기간 은신했던 곳이다. 그 옆으로 일제강점기 때 태평양전쟁의 총알받이로 강제동원된 4,385명의 학도병 이름이 적혀있는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와 ‘4.19기념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학로로 접어들면 뒷골목에는 1925년 문을 연 중식당 진아춘이 5대 사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1956년 문을 연 학림다방은 당시 ‘문리대학 제25강의실’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1980년대에는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학림사건’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흥덕동천 물길의 흔적을 따라 마로니에공원과 방송대를 지나 만나는 서울사대부설초등학교 정문도 눈여겨 봐야할 유적이다. 4개의 석조기둥은 원래 탑골공원의 정문이었으나, 탑골공원을 정비하면서 1969년 당시 서울대학교 법대 정문으로 이전되었다. 그후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겨가면서 부설초등학교 정문 기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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