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Column

홍대순
광운대학교 경영대학원장
<한국인에너지> 저자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낸 최고의 명문 가문 여섯 형제가 경술국치가 되자 전 재산을 처분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이 순국한 일가가 있으니 바로 우당 이회영 6형제가 그 주인공이다. 우당 가문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후손이며 정승, 판서, 참판이 계속 배출된 소위 삼한갑족(三韓甲族,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이었으며 특히 둘째 이석영은 남양주에서부터 서울 흥인지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도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당대 손꼽히는 대부호였다.
그러나 이회영 6형제는 나라를 위해 부와 명예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하고 6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넘어가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당시 처분한 재산을 요즘 물가로 환산하면 1조원이 넘는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국사 시간에 배운 신흥무관학교. 우당 이회영에 의해 설립된 그곳에서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에서 승리의 주역이 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으며 신민회, 서전서숙, 헤이그 특사 등 종횡무진하며 국내외 항일운동에 올인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6형제 중에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을 제외한 다섯 명은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순국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우당 이회영은 궁핍한 탓에 가족과 생이별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32년 뤼순감옥에서 고문으로 옥사하게 된다. 
30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눈을 감는 순간 예순여섯 백발의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말이다. 이회영 선생의 다큐멘터리에 나온 문구인데 눈시울이 붉어진다. 
또한 당대 최고 부호로서 신흥무관학교의 경제적 뒷받침을 해왔던 이석영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중국 빈민가를 전전하다 세상과 하직하고 말았다. 독립운동을 위해 매우 큰 전 재산을 내놓고 정작 자신은 굶어 죽게 되었으니 너무나도 비통할 따름이다. 이처럼 이회영 6형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를 말이 아닌 간절한 행동으로 보여줬다. 
문득 대한민국 사회지도층 중에서 과연 몇 명이 이회영, 이석영 선생처럼 할 수 있을까? 남부러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6형제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땅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축복이자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태어났는데 나라가 없는 설움과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음악극 <통인동128번지>는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의 삶을 다룬다. 극 제목은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 중 부족한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비밀리에 잠입, 은거하던 곳으로 해방 후 그 후손들이 본적지 주소로 삼은 데에서 유래됐으며 영국에서도 공연됐다. 
6형제가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함을 전하고 싶어, 보석같이 반짝이는 6형제의 이름을 이렇게 목 놓아 불러보고 싶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봄기운 가득한 3월 ‘이회영 기념관’을 찾아가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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