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Column

홍대순 
경영큐레이터, <아트경영> 저자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발견은 그야말로 드라마 그 자체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 해체공사를 하던 중 2층 탑신부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이 나왔다. 바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에 제작되었는데, 1,300년 전 목판 인쇄된 ‘종이’가 고스란히 석가탑 속에서 숨 쉬고 있던 것이다. 1,000년 이상 버티는 종이가 아니었으면 영영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17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바이에른 막시앙 2세 책상의 자물쇠 손상 부위를 복원하는 데 한지를 사용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카르툴라(Chartula, 프란체스코 성인이 직접 쓴 기도문이 기록된 종이) 복원에 한지를 사용했고, 교황 요한 23세는 지구본 복원에 장력이 우수하고 곡면에서 주름이 잡히지 않는 한지를 선정했다. 한지의 진가는 전 세계로 퍼지고 있으며 외국인들도 한지의 우수성에 감탄 중이다. 
그렇다면 왜 한지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을까? 이는 탁월한 소재와 독특한 가공기술 때문이다. 한지는 리그닌(Lignin)과 홀로-셀룰로오스(holo-cellulose) 성분이 함유된 닥나무를 사용하는데, 여기에 천연재료인 잿물을 사용하여 변질되지 않고 열화되지 않는 중성지 속성을 띄는 것이 큰 특징이다. 또한 ‘외발뜨기’를 통해 닥섬유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서로 얽혀 질기고 강하다. 그리고 ‘도침’이라 불리는 독특한 표면처리기술을 통해 지질(紙質)이 치밀하고 광택이 난다. 이처럼 수많은 공정을 거쳐야 한 장의 한지가 완성된다. 그래서 장인의 손을 99번 거친 후에 사용자에게 넘어간다는 의미로 백지(百紙)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우리의 자랑스런 ‘전통과학’인 것이다. 미래에서 온 종이, 바로 한지라 하겠다. 
중국에서도 경전이나 역대 제왕의 전적을 기록할 때는 한지를 사용했다. <계림유사>, <고반여사> 등에는 “고려지(한지)는 희고 단단하고 윤택이 날뿐더러, 글을 쓰면 먹이 잘 먹어 좋은데, 이것은 중국에 없는 진기한 것”이라고 격찬하고 있다. 세계에서 각광 받는 한지가 정작 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한지가 지닌 위대함을 칭송하기는커녕 “아니, 종이가 뭐 이렇게 비싸냐?”는 공격을 받기 일쑤다.
이제 한지를 잠에서 깨워 ‘한지 로드’의 청사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벽지, 단열재를 비롯한 인테리어 자재로도 가능할 것이고 패션, 의류도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기능, 친환경, 웰빙의 아이콘으로서 자동차, 의료, 전자산업 등 다양한 분야 산업소재로까지 확장시킨다면 어떨까? ‘우리의 오래된 전통이 인류의 미래’가 되는 커다란 사건이다. 특히 전 세계는 치열한 소재 전쟁 중이다. 한지는 저탄소, 친환경 시대에 걸맞는 소재 혁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최근 경영계의 화두인 ESG에도 도입해볼 여지가 충분하다. 친환경, 고기능성의 한지를 산업으로 키워볼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그리고 한지가 소재로 쓰인 완성제품에는 ‘한지 인사이드(Hanji Inside)’ 마크를 찍어서 격을 한층 높여야 한다. 지금 당장 우리 회사 제품에 한지를 소재로 접목시킬 부분을 찾아보고 한지 스토리를 입혀보면 어떨까? 전 세계 산업현장에서 한지를 필요로 하는 기업들이 넘쳐나고, 한지의 도시 전주에서부터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지로드’가 완성될 것이다. 

저작권자 © 월간 CEO&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