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nt of View

민희식   
크리에이티브워크 대표 / 에스콰이어 前 편집장 

1994년, 필자가 <마리끌레르> 한국판 편집장으로 재직할 때 프랑스 파리에서는 이영희 한복 패션쇼가 열렸다. 그 당시 전 세계는 일본 젠(禪) 스타일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다. 1980년대부터 요지 야마모토, 이세이 미야케, 다카다 겐조 등 일본 브랜드들은 기모노를 앞세워 세계 패션 시장의 주류로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뒤늦은 출발이지만 파리에서의 첫 한복 패션쇼는 현지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현지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특히 한국 고유의 소재인 누비 한복은 한국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국제무대에 처음 등장한 한복을 접한 해외 언론들은 생경하지만 매력적인 이 옷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현지 언론들은 한복을 기모노의 아류로 인식했는지 ‘코리안 기모노’라고 표기하는 우(愚)를 범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 매체가 프랑스 
<마리끌레르>였다. 프랑스 패션지에서 한복을 표지로 다룬 것은 대단한 성과였으나 커버스토리에 한복을 코리안 기모노로 소개하는 큰 오점을 남겼다.
파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복 패션쇼가 성료된 다음 날, <조선일보>는 재빠르게 <마리끌레르>가 한복을 코리안 기모노로 소개했다고 보도했다. 파리에서 최초로 한복 패션쇼가 열렸다는 사실보다는 기모노에 방점이 찍힌 것이다. 한마디로 민족 감정을 건드리기 충분한 기사였다. 
사고는 프랑스에서 쳤으나 한국판 편집장이었던 내가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라이센서(Licensor)인 프랑스 본사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자신들은 어떠한 실수도 오류도 범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동양의 브이넥 옷을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 기모노란 용어로 통일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한복이란 용어는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사전에 ‘한복’을 알릴 수 있는 홍보작업이 전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콘텐츠만 좋으면 세계가 우리를 알아봐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의 장벽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오늘날 K-POP을 비롯해 한류가 전 세계를 강타한 이유는 철저한 사전기획과 글로벌화된 제작 시스템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 발굴과 프로듀싱, 홍보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전문가 집단이 모여 철저한 분석과 기획 아래 집단창작으로 이루어진 결과다. 한류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한복을 기반으로 한 K-패션이 세계적인 시선을 끄는 이유는 탄탄한 기획력을 갖춘 K-POP의 위력에 편승한 결과다. BTS와 블랙핑크가 한복을 입고 공연 한 번 하는 것보다 더 큰 홍보 효과는 없다.   
외연을 확장해 가는 한류는 K-패션 다음에 K-아트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어가지만 현재 국내 미술계는 K-아트의 전망에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국내 작가 중 백남준을 제외하고는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작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K-아트도 컨템포러리보다는 전통미술을 특화해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길이다. 올해 뉴욕 크리스티 록펠러 센터에서 열리는 한국 고미술품 경매에서 BTS의 RM이 사랑한 달항아리의 경매 추정가가 최대 200만 달러에 달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전통에 기반한 K-아트의 미래는 청색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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