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Column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 원장 / <아트경영> 저자

훈민정음이 전 세계로부터 극찬받을 수 있었던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의 해설서로,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설명한 글이다. 훈민정음을 왜 창제했는지부터, 자모 글자의 모양 및 해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기에 전 세계 언어학자들이 이것을 보고 훈민정음의 과학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글의 진가를 증명해 보여준 귀중한 기록이다.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Geoffrey Sampson)은 “한글은 과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글자로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했으며, 시카고대 언어학 교수 제임스 맥콜리(James D. McCawley) 역시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위대한 글자인 한글을 전 세계 언어학계가 찬양하고 한글날을 기념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고 타당한 일이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처럼 귀중한 <훈민정음 해례본>이 아예 소실될 뻔한 사연을 아는가? 인류의 보물로 추앙받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떻게 전해진 것일까? 조선 왕실에 고이 보관되어오다가 박물관에 순탄하게 소장된 문화유산이 결코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해례본이 발견되고 세상에 공개된 과정은 드라마 그 자체다.
1906년에 태어난 간송은 당대 거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물려받은 가문의 재산을 우리나라 문화재를 사들이는 데 쏟아부었고, 문화재로서 보존가치가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큰돈을 들여서라도 어떻게든 구입했다. 문화재야말로 국가의 자존심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일제가 우리나라 문화재를 빼돌리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간송은 진정한 우리 문화재 지킴이였고, 숭고한 문화보국(文化報國) 정신으로 우리 문화재를 지켜온 것이다.
1943년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1000원에 판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동으로 가는 고서 중개상에게 1만1000원을 주며, 책 주인에게 1만 원을 주고 나머지 1000원은 수고비로 가지라고 말했다. 당시 1000원은 서울에서 큰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책 주인은 1000원에 팔겠다는데 그보다 10배인 1만 원을 지불한 것이다. 간송은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 존경스럽지 않은가?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넣었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비롯해 일제의 한글 탄압은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가 조선총독부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일제는 쥐 잡듯이 찾아서 불태워버릴 것이 너무나 자명했다. 간송은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고, 마침내 광복 이후 세상에 공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었다. 6·25전쟁으로 피난을 가야 하는데 <훈민정음 해례본>을 가지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간송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피난길을 나섰고, 생사가 오가는 피난 현장에서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낮에는 품고 밤에는 베개 삼아 지켜냈다. 이처럼 간송은 타고난 부호였음에도 불구하고, 문화보국과 문화 독립운동가로서의 찬란한 삶의 향기를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간송은 대한민국 지도층의 삶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이러한 인생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삶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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