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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명관 마케팅 스페셜리스트 / ‘스타벅스의 미래’ 저자
맹명관 마케팅 스페셜리스트 / ‘스타벅스의 미래’ 저자

1993년 6월 7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 안에서 삼성 제품의 디자인 실태를 낱낱이, 적나라하게 보고한 일명 ‘후쿠다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이 13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의 시발점이 된 스토리다. 이제부터 양보다는 질 위주로 간다는 선언을 촉발시킨 보고서의 키워드는 디자인이었지만, 핵심은 ‘제대로 된 개혁을 하려면 근본부터 바꾸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후쿠다 고문은 일본의 유명한 교세라 출신으로 디자인에 대한 근본적 사고를 전환시킨 인물이다. 그의 철학은 다음과 같았다. ‘디자인은 색이나 모양이 아니다. 기구설계와 금형기술은 하류적 디자인이다. 핵심 디자인은 상품기획이다.’
이 보고서를 접한 이 회장은 삼성전자 임원 200명을 프랑크푸르트로 긴급 소집하여 진정 삼성그룹이 후쿠다 고문의 조언처럼 2류 기업인지 치열한 토론을 벌였으며, 3년 뒤 A4 용지 8500장 분량의 ‘지행(知行) 33훈(訓)’을 발간한다. 이는 알고 행동하며 쓸 줄 알고 가르치고 평가할 줄 아는 ‘지행용훈평’의 준말로, 삼성의 대오각성과 혁신의 의지가 얼마나 남달랐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지행 33훈’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통찰하며 21세기 디자인 경쟁의 근본적인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 회장을 격노하게 했던, 즉흥적이고 감성적인 대응은 이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삼성그룹을 초일류로 격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0년 뒤 우리는 삼성그룹이 그토록 염원했던 혁신의 한 지류를 만난다. 사업체의 인적구성이나 핵심기술의 변화는 주지 않으면서 사업 방향만 바꾸는 ‘피봇(Pivot: 회전하는 물체의 중심을 잡아주는 중심점)’이 그것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장성이 보이지 않거나 성과가 나지 않을 때 과감하게 기존의 계획을 엎어 버리고 방향을 바꾸는 비상수단 같은 것이다. 이 두 개념을 서로 비교하면 내용에 있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만약 30년 전의 후쿠다가 현재의 피봇팅을 보았다면 동의어라 주장할지도 모른다. 
일례로 카카오톡이 초기에는 지금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부루닷컴과 위지아라는 소셜 기반 서비스를 출시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굴하지 않고 사업 방향을 완전히 전환해 지금의 카카오톡 메신저를 만들었다. 스타트업의 핵심인력과 기술은 그대로 유지하고 사업 방향만 틀어서 성공한 전형적인 피봇팅 사례다.
2015년 한 인터뷰에서 후쿠다 고문은 삼성을 비롯한 21세기형 기업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이제 1993년의 이야기는 잊어 달라. 신경영으로 달성한 지금까지의 성공 사례에 대한 기억은 잊고 리셋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미래에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삼성 전체가 진심으로 모색해 나가야 할 시기다.”
바야흐로 13쪽 보고서를 다시 올려야 할 때가 됐다. 위기의 그림자가 넓고 깊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분야의 문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앞서 신경영과 피봇을 통해 보았듯이 대증적 처방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며 근본적 문제 해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시공을 떠나 후쿠다와 카카오는 그래서 일란성 쌍둥이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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