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e-makers Interview, 고든 브루스 Gordon Bruce Design LLC 대표

스티브 잡스가 남긴 명언 중에 ‘디자인은 보여지는 것뿐만이 아닌 제품의 작동 원리’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산업 디자이너는 제품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과 섬세함이 요구되는 직업이다. 삼성, IBM, GE, 뷜러(Bühler) 등 존경받는 글로벌 회사들의 산업 디자인을 도맡았으며,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디자인 공모전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 Dot Design Award)’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Gordon Bruce Design LLC의 대표 고든 브루스(Gordon Bruce)를 만나 그의 디자인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표님은 산업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고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계신데요,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요?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것의 시발점은 사용자를 고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품을 누가 사용할 것인지, 그게 동물이든, 사람이든, 기업이든, 누가 됐든 그 사용자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제품을 설계하는 게 디자인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죠. 이를 잘 담아내는 예시는 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매일 의자를 사용하는 만큼 의자는 시중에 많지만 잘 디자인된 의자는 놀랍게도 흔치 않죠. 인간의 자세와 신체를 고려해 가장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설계되었는지, 의자에 앉기 위해서 몸을 불편하게 비틀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사용자의 문화에 걸맞은 요소를 지녔는지 등 단순해 보이는 의자 하나도 좋은 디자인의 제품으로 거듭나려면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만큼 디자인은 단순히 보여지는, 물리적인 것 이상의 매우 복잡한 본질을 지녔죠. 사용자를 고려했는지 따지고 난 뒤에서야 그 디자인이 영리한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디자인이 환경, 제품의 특성, 기능 방면에서 알맞은 재료를 사용하였는가?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제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가? 제품이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설계되었는가? 이후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너무나도 많지만,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은 사용자를 고려하는 것이죠.

대표님은 1990년대 한국의 삼성 디자인 연구원 IDS(Innovative Design Lab of Samsung)에서 제품 디자인 회장으로 활동하시기도 했는데요, 그 시대와 현재 시점의 한국 디자인 산업을 어떻게 보시나요?
제가 삼성에서 활동했을 때는 한국 디자이너들이 능력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외국의 유명 디자인 컨설팅 업체에게 디자인을 맡기는 것이 성공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던 때였으니까요. 그 시절 한국 기업들은 외국 기업들의 성공적인 디자인을 따라하기에 급급해 대형 프로젝트들을 모두 해외 컨설턴트들이 진행했기에 한국 디자이너들이 능력을 키우기 어려웠습니다. 또 당시의 한국 고위 임원들은 디자인의 결정권이 본인에게 주어지길 원해 회사 내의 디자이너들에게 일을 맡기는 걸 꺼려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그 시절 제가 일했던 삼성의 제품들은 각각 너무나도 다른 디자인을 갖고 있어 삼성 고유의 특징, 통일성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점이었죠. IDS는 삼성 디자이너들을 교육하기 위해 마련된 곳이었는데, 제가 그들의 교육자로서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목표는 삼성 디자이너들이 본인의 능력을 최대로, 또 자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이끌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디자이너들이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고위 임원들의 지시에 따르는 조직문화를 지녔던 삼성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았죠.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해결 방법을 강구하셨나요?
교육 과정 중 제가 삼성 디자이너들에게 특별한 지시사항 없이 종이로 의자를 만들어보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습니다. 교육자가 항상 방향을 제시하고, 그걸 따라야 하는 것에 익숙했던 한국 문화에서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과제였죠. 그들은 저에게 어떤 의자를 만들어야 좋은 것인지 물었지만, 저는 되려 그들에게 그걸 저에게 결과물을 통해 설명해주는 것이 과제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진정한 배움은 본인이 직접 터득하고 깨달으면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렇게 삼성 디자이너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과제를 내자, 처음에는 저와 비슷한 과제를 냈던 서양 교육자들 모두 삼성 디자이너들에게 교육자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죠. 하지만 마지막 교육자 평가에서는 저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으며 마무리했던 기억이 납니다. 비로소 삼성의 디자이너들이 스스로 배우는 것의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였겠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익숙한 사고방식을 바꾸는 건 어려울뿐더러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끝내 삼성 디자인 조직문화에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매우 뿌듯한 결과였습니다. 삼성의 변화로 다른 한국 기업들도 조금씩 변화해가는 추세를 보였고, 지금은 많은 국내 디자이너들이 인정받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 같아 기쁩니다.

대표님이 삼성 IDS에서 마련하신 프로그램이 참 인상 깊은데요, 삼성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하시나요?
삼성이 저를 부른 것은 당시 이건희 회장님이 삼성 내부에 큰 변화가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희 회장님이 삼성 직원들에게 ‘부인과 아이들을 제외하고 일상의 모든 것을 바꿔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기도 하죠. 그만큼 제가 삼성에서 갖고 있던 주 역할은 문화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저의 동료들은 차근차근 삼성의 조직문화를 하나씩 바꾸어나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삼성은 남성 중심적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250명쯤 되는 디자이너들 중 여성은 몇 명뿐이었고, 그들은 커피를 타는 잔심부름을 하는 등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문화를 바꾸기 위해 저와 함께 일했던 동료 미호(Miho)가 “이 빌딩에서는 앞으로 일을 조금 다르게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성 직원들이 남성들에게 차를 따라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직원들에게 공지했던 게 기억에 남네요. IDS에서 저와 동료들은 훌륭한 여성 직원들의 활약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그게 삼성 디자인의 조직문화를 조금씩 바꿔나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대접받는 것에 익숙했던 남성 직원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시간이 갈수록 여성 디자이너들이 능력을 인정받고 그들의 참여가 더욱 활발해지는 것을 보며 삼성 디자인의 문화가 바뀌었음을 실감했습니다. 또 디자인 교육은 삼성 디자이너들의 능력 향상에 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3개의 디자인 수업만 가르쳤지만, 디자이너들이 제품 작동 원리를 본질적으로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에 젊은 기계공학자들도 고용하도록 하여 기계공학 교육도 마련했습니다. 당시 디자이너들은 아이디어가 넘쳐나도 그걸 현실적으로 어떤 원리로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죠. 그래서 그 시절에는 디자이너들이 엔지니어들에게 아이디어를 넘기곤 했는데, 상호 간의 소통이 부족해 디자이너들의 본래의 아이디어와는 전혀 다른 제품을 엔지니어들이 가지고 오는 경우도 빈번했죠. 이러한 상황에서 IDS 프로그램의 디자인 교육은 삼성 디자이너들이 실질적으로 제품을 어떻게 구상하는지에 대해 방향을 잡아주고 그것을 실현하게 하는 능력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제 동료들이 불러온 변화들이 삼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른 기업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삼성의 변화는 다른 기업들이 따라 할 만한 본보기가 되어 다른 기업들도 서서히 문화를 바꾸게 된 것이죠. 최근 2년간 제가 그 시절 교육했던 삼성 디자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도 IDS에서의 디자인 교육이 삼성의 성공 요소 중 하나였다고 생각할뿐더러 LG 등 다른 기업들이 변화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IDS의 프로그램은 삼성의 조직문화, 디자이너들의 능력 향상에 큰 기여를 함과 동시에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님이 삼성, IBM, GE 등 다양한 글로벌 기업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가운데 대표님이 디자이너로서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프로젝트가 있나요?
어느 한 특정 프로젝트라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IBM에서 획기적인 디자이너인 엘리엇 노이스(Eliot Noyes)와 같이 일하면서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디자인의 진정한 의미가 기업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에서 온다는 것을 저에게 깨닫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시기 사람들은 IBM을 단순히 전자제품을 제조하는 기업으로만 생각했죠. 하지만 그는 IBM을 ‘인류가 환경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를 만드는 회사’라고 표현하곤 했습니다. 같은 회사를 논할 때도 그는 회사를 바라보고 표현하는 방식이 남들과는 완전히 달랐죠. 지금의 IBM은 물리적인 제품보다도 디지털 제품을 더 많이 제조하는데, 그때 사람들 말처럼 전자제품 제조업자로만 회사를 구축해 나갔더라면 디지털화를 겪은 세상에서 IBM은 수명을 다했을지도 모릅니다. 노이스는 회사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꿰뚫어보고 그것을 디자인으로 표현하는 진정한 디자이너였습니다. 다른 회사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IBM만의 고유한 색은 무엇인지, 그것을 디자인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제품을 만든 것이 지금의 IBM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쳤죠. 그가 저에게 보여준 이러한 진정한 디자인의 가치는 제가 다양한 회사에서 많은 제품을 만들 때의 기반이 되었고, 제가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던 큰 요인이라고 생각해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

대표님이 디자인한 제품들은 박물관에 전시될 만큼 높은 가치를 지녔는데요,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제품은 무엇인가요?
저는 IBM의 획기적인 슈퍼컴퓨터인 ‘씽킹 머신(Thinking Machine)’을 디자인한 3명의 디자이너 중 하나입니다. 이는 몇 년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박물관 중 하나인 MoMA(Museum of Modern Art)가 영구적 전시 컬렉션에 포함시켰을 만큼 의미 있는 제품이죠. 지금으로 따지면 아이폰5 정도밖에 안 되는 성능을 지녔지만, 디자인한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컴퓨터였습니다. 그 컴퓨터는 당시의 다른 컴퓨터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획기적인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뇌처럼 작동하는 여러 개의 병렬 프로세서들을 상호 작용하게 하고, 불빛이 반투명한 표면 위에 비춰지게 해 컴퓨터 사용자에게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소통을 가능하게 한 게 큰 차별점이었죠. 이 제품은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일 뿐더러 당시 업계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혁신적인 제품이기에 제가 아끼는 수많은 제품들 중 하나만 고른다면 씽킹 머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겠네요.

모든 CEO들이 디자인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너무나도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성공한 기업을 들여다봐도 기업이 소비자와 이어지는 것은 제품을 통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마케팅과 브랜딩 전략들도 결국은 제품에 기반해 소비자들이 그 제품을 사용하는 경험에 가치를 더하고자 하는 것이죠. 만약 기업이 소비자들에게 진정으로 닿고자 하고 더욱 성장하기 위해 전략을 짜고 싶다면 소비자들이 제품을 사용할 때의 경험을 특별하고 가치 있게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건 잘 디자인된 제품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소비자들이 제품을 재구매하게 만들고 그들과 신뢰를 쌓고 싶다면 디자인은 절대 CEO들의 고려사항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사진 고든 브루스 디자인 LLC

 

CEO& April 2022  

저작권자 © 월간 CEO&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